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개전 당시 관동군의 전력과 작전 계획 변화 === 일본 [[관동군]]의 1945년 8월 당시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만주의 관동군(야마다 오토조 대장)은 제1방면군(만주동부)과 제3방면군(만주서부), 제17방면군(한반도남부+제주도), 제4군(만주북부), 제34군(한반도북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외 1개 항공군과 쑹화 해군 전단이 있었다. 관동군 직할이 아닌 제5방면군 등은 후술한다. 또한 관동군에 17방면군, 5방군, 만주군까지 몽땅 다 합치면 1,271,000명이나 개전 직전의 관동군만 따지면 713,000명이다. 방면군 사령관은 대장이나 조선남부에 설치된 17방면군 사령관만 중장이다. 예하의 군사령관과 사단장의 계급은 중장, 여단장은 소장이다(일부는 중장). '제121사단', '독립혼성제132여단'은 일본어 정식 명칭이며, '제121보병사단', '제131독립혼성여단'이라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영어식 표현이다. 문서 전체에 두가지 표현이 혼재되어 있다. 만주 동부의 수비를 책임지는 키타 세이이치 대장의 제1 방면군은 제3, 제5군을 두고 각각 3개 사단과 1개 독립혼성여단을 휘하에 두었다. 병력은 휘하에 222,157명이었다. 제1방면군 직할대 - 제122보병사단, 제134보병사단, 제139보병사단 제3군 - 제79보병사단, 제112보병사단, 제127보병사단, 제128보병사단, 제132독립혼성여단 제5군 - 제124보병사단, 제126보병사단, 제135보병사단 만주 서부의 수비를 책임지는 우시지로 준 중장의 제3방면군은 휘하에 4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30군과 3개 사단과 1개 독립혼성여단으로 구성된 제44군을 두었다. 병력은 180,971명. 제3방면군 직할대 - 제108보병사단, 제136보병사단 제30군 - 제39보병사단, 제125보병사단, 제138보병사단, 제148보병사단 제44군 - 제63보병사단, 제107보병사단, 제117보병사단, 제9독립전차여단 만주 북부에는 우에무라 미키오 중장의 제4군을 배치했으며, 병력은 95,464명이다. 제4군 - 제119보병사단, 제123보병사단, 제149보병사단, 제131독립혼성여단, 제135독립혼성여단, 제136독립혼성여단 한반도 북부에는 세니치 쿠시부치 중장의 제34군 50,104명이 있었다. 1944년에 6방면군 산하로 동시에 창설되어, 1945년 3월 관동군으로 소속 변경 되었고 압록강 일대에 주둔 한다. 38선 이북은 소련 담당이어서 소련은 함흥에 대규모 상륙작전까지 감행하며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 제34군(함경북도 경흥) - 제59보병사단(함경남도 함흥), 제137보병사단(함경남도 정평), 제133독립혼성여단 한반도 남부 및 제주도를 담당하는 제 17방면군은 코즈키 요시오 중장하에 260,000명이 있었다. 원래는 수십년간 조선에 주둔하던 [[조선군]] 이었으나 한반도 북쪽을 관동군 소관으로 넘기고 한반도 남부만 담당하다가, 8월 10일 06:00 부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최후를 맞이 한다. [[조선군]] 시절 내내 조선을 담당하는 명문 사단인 19사단, 20사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 졌고, 날림으로 급조한 사단들만 존재 하였다. 산하의 제58군은 제주도만을 담당하여 병력 밀도가 매우 높았다. 제17방면군 - 제120사단(경성, 제150사단(군산), 제160사단(광주), 제320사단(부산), 제127독립혼성여단(부산) 제58군 -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제108독립혼성여단 홋카이도, 남사할린, 쿠릴 열도를 담당하는 제5방면군(기치로 히구치 중장)도 소련군의 공격 예정 범위 내에 있었다. 이들은 관동군 소속이 아닌 별개의 부대이며 예하 쿠릴 열도의 91사단(츠츠미 후사키 중장)의 경우 2차 대전 최후의 대규모 전투인 [[슘슈 섬 전투]]를 벌인 부대로, 8월 18일에 개전하여 무려 9월 5일에야 쿠릴 전역이 점령 되었다. 제5방면군(홋카이도 삿포로) - 제88사단(남사할린), 제91사단(쿠릴 열도), 제7사단, 제42사단, 제89사단, 제101여단, 제129여단 만주군은 중국인, 몽강자치군은 몽골인으로 구성된 괴뢰부대이다. 만주군의 경우 명목상 만주국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관동군의 작전지휘를 받았다. 예를 들어 조선인들로 구성된 [[간도특설대]]의 경우 만주군 제5군관구 소속으로 러허성의 항일독립군 토벌을 담당하며, 제5군관구는 [[관동군]] 제3방면군의 작전지휘를 받는다. 전쟁이 끝나고 관동군은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개고생 하였지만, 대부분 중국인으로 구성된 만주군은 무장해제 후 각자 집으로 갔다. 덕분에 [[백선엽]], [[정일권]], [[박정희]]등은 신생 한국군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만주군 - 170,000명, 1사단, 2사단, 보병 9개 여단, 혼성 2개 여단, 기병 1개 여단 몽강자치군 - 44,000명 편제상으로는 괜찮은 전력 같아 보이지만 관동군은 계속되는 전황 악화 속에 주력부대가 껍데기만 남은 채 병력과 장비가 본토 방위를 위해 꾸준히 차출당하고, 신규편성 부대 등으로 그 공백을 메꾸고 있어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관동군의 기본적인 구성 제대는 보병 사단이었는데 사단 당 구성 인력은 소련군 소총병사단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무기는 소련군보다 빈약한 편이었다. [[일본군]] 사단 편제는 2종류가 있었다. 일반적인 사단 편제는 3각 편제였다. 규정상 사단 정원은 20,000명이었지만 45년에는 12,000명에서 16,000명 선까지 줄어들었다. 게다가 어떤 사단은 9,000명까지 병력이 줄었다. 3각 편제 보병 사단은 각각 3개 대대로 구성된 3개 연대와 기병대대, 포병 연대, 수송 연대, 공병 연대, 통신 중대와 기타 지원 제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당시 관동군은 31개 사단, 12개 독립혼성여단, 2개 기갑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19, 107, 117, 63, 39사단만이 1945년 1월 이전부터 만주에 있던 사단들이었다. 나머지 25개 사단의 훈련은 충분하지 못했고 모든 장비가 부족한 형편이었다. 대본영에서는 관동군 전체의 15퍼센트만이 전시에 즉시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관동군에는 1,115대의 전차와 전투 차량이 있었지만 개별 전차의 성능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관동군의 전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자 대본영은 결국 관동군의 대소전 전략을 바꾸고 말았다. 1944년까지 유지했던 소련군과의 충돌시 소련군에 대한 공세 계획은 전부 취소되었고 전부 방어 계획으로 전환되었다. 관동군은 소련군과 충돌시 국경 지대에서 시간을 끌면서 소련군의 예상 공격 방향으로 종심 방어망을 구축할 계획을 세웠다. 관동군의 새로운 방어 계획은 1945년 5월에 시행되었다. 5~6월 동안에 관동군은 소련군의 예상 침공로마다 나름 효과적으로 배치되었고 퉁화 지역의 방어 상황과 응전태세 재정비를 마쳤다. [[파비아 전술]]을 채택한 이 계획에 따르면 제1방면군은 국경 지대에 배치된 소대에서 대대 수준의 병력들이 최대한 지연전을 벌이고 후속한 사단과 여단 본대가 국경 지대 4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팡쳉, 치흐싱, 타치엔창, 롯조커우, 투멘에 방어 거점을 구축하게 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배치된 모든 사단의 완전 편제가 끝날 때까지 시행이 미뤄졌다. 제3 방면군은 소대와 중대 규모의 제대를 사용해 한다가이에서 우차커우에 이르는 서부 국경 지대를 요새 지대에서 지연전을 벌이고 본대는 설정된 주 방어선으로 후퇴하도록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방어선은 신경에서 장춘이고 최후 방어선은 후안젠에서 흐신핀, 장춘을 잇는 요새 지대였다. 제4독립군은 만주 북서쪽 국경 지대에서 지연전을 벌이며 다싱안링 산맥을 지나는 철도를 통해 폭토우, 넨쳉, 페이안 라인을 지키며 후퇴하면서 치치하얼에 도착해 관동군 본대와 합류할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전 제대의 3분의 1이 국경에, 3분의 2가 종심을 갖추고 배치되어야 했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만주의 험한 지형, 깊은 종심, 일본군의 지연전으로 인해 만주 중부까지 진격한 소련군의 공세 지속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보급선 유지가 힘들 때에 맞춰서 소련군을 저지시키고 잘 하면 역습도 가해 소련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낼 것도 기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